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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참담한 성사

작성자

최성옥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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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갑자기 참담한 성사聖事


  개인적으로 신앙과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말 뜻 하나만 제대로 알고 살아도 성공한 인생일 것이라고 통찰할 때가 있었다. 그 단어중 하나가 성사聖事(Sign)”이다. 성사란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의 표징(表徵)’으로 거룩하고 중요한 일 또는 과정을 말한다. 사람의 한 생애는 여러 중요한 과정들 ‘탄생-성장-혼인-병 듦-죽음’이 있듯이, 신앙의 한 생애도 여러 중요한 과정들, ‘세례-견진-성체-혼인과 성품-고해-병자와 임종’등 일곱 성사들이 있다. 일곱이란 아라비아 숫자 일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성서에서 일곱은 충만하고 절대적인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일곱 성사란 그 대표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연적이고 신앙적인 과정과 법칙은 시작이 있는 한 분리불가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자주 이 분리불가한 속성을 분리하여 이해하고 수용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오래되고 익숙한 인습에 편승하려는 무지와 게으름으로 인해. 그래서 그 시작과 젊음은 창대하게 대접하지만 그 마침과 노쇠함 사람짐은 초라하게 대접한다. 가령 탄생과 세례성사는 경탄이지만, 늙고 병들고 죽는 고해와 병과 죽음은 절망과 비탄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많다 있다. 사실이 그렇다. 일찍이 욥이 사탄모의로 시련의 고통을 겪으면서 “ 주시는 것도 거두시는 것도 다 주님이시니 다만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라고 했지만 그것은 그 옛날 성경에서 욥의 말일 뿐이고, 교리실에서 들을 때는 ‘그런가보다’ 라고 이해되는 바도 있었지만, 막상 현실이라면, 그것도 나라면 상황은 다르지 않겠는가? 그런데 교회는 성사聖事라니...세상에 늙고 병들도 죽는 것을 대사大事라고 하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성사聖事 거룩한 일이라니... 경우에 따라 어떤 이는 불같이 화를 내고, 심하게는 돌을 던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의 교회는 전자가 성사이듯 후자도 분명히 성사라고 한다. 심지어는 오랜 역사 전통의 마련으로 죽음(장례)에 대해서 전례 일등급(대축일급)으로 봉헌한다. 장엄하게.

나는 성사라는 말과 현실이란 상황에, 이 단어를 기억하고 소환해낼 때마다 거룩한 전율을 느꼈었다. 특히 임종과 죽음의 경우 앞에서. 2020 한 해 더욱 그런 경험이 있었다. 갑장 차동엽 신부님, 성서 백주간을 만들어 주신 장익 주교님의 선종, 221년전 육시형으로 순교한 위대한 신앙선조 황사영 알렉시오의 기일에 묘지에서도 그랬다. 그리고 가끔 언제가 나의 임종과 죽음에도 여유와 유머로 마무리 할 수 있기를..., 마지막 그 부르심의 순간, 마리 루치아 수녀님이 성화 영광의 신비 제 4단의 예수의 부르심에 성모님 포즈로 그렇게 아빠 품에 달려가 안기리라 꿈꾸고 있었다.

2020년 12월 14일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고 있던 후배 마리아 라파엘 수녀님이 갑자기 하느님께 안겼다. ‘갑자기라서 ‘마흔 다섯 너무 젊은 나이라서 두 가지 이유로 정말 큰 충격이었다. 어쩌면 홀로 황망하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수녀님의 그 순간의 두려움이 내 두려움으로 치환되고, ‘죽으니 별거 아니구나! 아무 것도 아니구나’ 라는 ‘허무’와 ‘무상’이 엄습했다. 평소 ‘천주교인인 나, 수도자인 나는 결코 허무와 무상할 수 없지. 암! 나의 모든 순간이 유의미하고 보람이지’ 라던 딴에는 견고한 듯 나의 신념은 바람처럼 날아가 버리고, ‘죽음은 장엄하고 거룩한 마지막 성사’ 라는 평소 생각도 비웃듯 흔들거렸다.

오늘은 수녀님이 온 곳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마무리 날, 코로나로 장례미사 참석 제한이 있어, 분원에서 수녀님을 위한 미사를 봉헌했다. 따듯한 형제애로 한달음에 달려와 주신 골롬반 수도회 양 신부님은 강론으로 와중에 놓치고 있는 귀한 진리를 다시금 일깨워주시고 각인 시켜주셨다. “믿는 이의 가장 큰 소원은 살아서나 특히 죽어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 아닌가요? 죽음은 바로 그 소망이 가장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신비의 과정 아니던가요? 사람이 연약한 존재라 몸이 쇠약해지면 마음도 하느님 향한 열정도 쇠약해기 쉬운데, 내가 볼 때마다 참 열정이 많았던 라파엘 수녀님은 젊고 힘찬 나이에 하느님을 만났으니, 사실 수녀님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행여 안 믿는 사람이나, 천주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래? 네가 그렇게 당해도 그런 말이 나오나보자’ 라고 악담이나 심하면 돌 맞을 일이다. 그러나 믿는이에게는 참으로 맞는 말이 아니던가? 천주교 신자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하느님 만남을 최고의 갈망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정체성이 천주교 신자이고 우리의 삶은 모든 것이 성사聖事인 것이다.   ‘예고한 대로 늦은 나이에“도 분명 성사聖事지만 ‘갑자기, 젊은 나이에’도 성사聖事임이 분명하다. 우리 생각과 판단이 ‘갑자기’이지 하느님은 오래도록 섭리하시고 안배하신지도 모르고, 임종과 죽음이라는 그 현실에 전연 무지와 무경험자인 우리들이 전연 알 수 없는 그 절박한 시간 수녀님만의 수녀님다움의 ”아멘“으로 어떻게 응답했는지, 우리는 도대체 알 수 없는 것이다. 수녀님과 이 사건의 혜량할 수 없는 마지막은 어쩌면 지혜서의 ‘그 의인의 갑자기’인지도 모르겠다. 지혜서는 그 의인의 갑자기 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련한 이들의 눈에 그가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가 우리 곁과 이 세상을 떠난 것이

아주 없어져 버린 것 재앙이라고 생각되겠지만

그는 평화를 누리고 있고, 사실은 불멸의 상을 받은 것이다.

마리아 라파엘의 하느님은 수녀님을 시험하시고

그가 당신 뜻에 맞는 사람임을 인정하고 사랑하여 일찍 데려 간 것이다.

하느님이 그녀를 찾아오셨을 때 그녀는 빛을 내고

짚단이 탈 때 튀기는 불꽃처럼 타오르며 응답했던 것이다.“ (지혜 3,1-8, 편집)

수녀님은 공동체,사도직, 기도생활에서 한창 환한 빛으로 타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자주 그녀가 앉아 길게 묵상 기도를 하고, 수첩에 뭔가를 기록하던 성당의 장소, 교리교재 연구와 연수에 카리스마적 공력으로 임하던 모습, 일 년간 분원의 참사로 더욱 공동체를 위해 시간과 자신을 내어주던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 특히 지난 12월 6일 주일 성 니콜라우스 주교 기념일(싼타 크로스)에 주교님으로 깜짝 출현하여 공동체에 남긴 마지막 유언은 마치 나 들으라고 준비한 듯 오래 도록 되새기며 실천할 거룩한 숙제이다. “서울 분원 수녀님들 하느님의 마음에 들도록 서로 사랑에 분발하세요. 하우스 미팅 회의 빨리 끝내려 하지 말고 끝까지 경청하며 듣고, 건강관리 잘 하세요”

 

Hodie tibi (오늘은 수녀님이...)


Cras mihi (내일은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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