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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 소임

작성자

최성옥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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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노동 & 소임

"노동의 가치와 존엄은 바로 우리 자신의 가치와 존엄입니다. 노동은 숭고합니다. 아버지의 손톱에 낀 기름 때가 삶을 지탱하게 하고, 어머니의 손톱 밑에 낀 잡초 때가 삶을 이어가게 하는 희망입니다.“(문재인 대통령, 노동절 축사 중). 노동이 숭고하고 신성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느님도 노동하셨기 때문이다. 인류역사에 가장 최초의 노동자는 누구인가? 바로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세심하고 주도면밀하게 세상창조사업을 계획하고 엿샛날의 창조 노동을 하신 다음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도 노동을 통해 생존하고 자아 실현 즉 구원에 이르며, 동시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에 이바지하게 된다. 인간은 이렇듯 노동하는 인간’으로 존재하며 살아간다.

80년대 한 직장 아가씨 선희씨가 00 주임에게 느닷없이 따귀를 맞는 장면을 목격했다. 놀랍고 큰 충격이었다. 맞은 본인은 아무소리도 안 하지는 못 하는지 그러고 있는데...., 지켜본 내가 시시비비의 경위를 불문곡직하고 분노의 항의를 표출했다. “말로 하지..., 왜 때리느냐?”고. 그 날 그 시각부터 사단이 났다.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흐릿하지만, 이제 00주임의 타깃은 선희씨가 아니라 나였다. 남의 일에 발칙하게 나서고 맹랑한 발설까지 해 댄 나와는 도저히 같이 일을 못하겠으니 “나가 달라”라는 이상한 주문을 했다. 팔십 년대 그 시절은 지금에 비교하면 무지와 폭력과 야만이 삼위일체로 난무하는 미망의 시대였다. “나가 달라”라는 말이 그 장소에서 나가라는 것인지, 아예 회사를 나가 달라는 것인지……. 내가 판단하기엔 두 번째인 것 같았다. 나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염에 싸여 두 번째 불을 질렀다 “나는 같이 일할 수 있는데요. 그리고 일도 해야만 하는데요.....! 나랑 정 못하겠다면, 못하는 00님이 나가시던지요?”라고 말씀을 되받았다. 거의 원자 폭탄 급으로 화가 난 그가 완력으로 나를 밀쳐냈다. 힘으로야 젊은 여성이 내가, 한창 때 건장한 남자의 완력을 당해낼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완력으로 떠밀려 문밖으로 쫓겨나…….제법 규모가 큰 ‘00 지역 노동청’을 찾아가 전후 사정을 말하였다. 말하자면 고발조치한 셈이었다. 담당 관계자는 빙글빙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돌아가면 잘 될 것이다” 바로 귀사歸社하기엔 나도 강철 심장이 아니었다. 늦은 봄 무렵이었던지 유난하게 화창한 날씨가, 내 마음 날씨와 너무 대조적이어서 더 우울하기 짝이 없는 기분이었다. 안암동 고대 병원에 뇌졸중으로 입원한 큰 숙부를 찾아갔다. 숙부는 오래 전에 서울 경동시장에서 장사를 하여 큰돈을 벌어 부자가 되셨지만, 벌 줄만 알지 쓸 줄을 모르는 노랭이로 사시다 이 난리가 나신 분이셨다. 이제 살 만한데 뇌졸중으로 편마비가 되어 불쌍한 신세로 병석에 누워계신 것이다. 그분도 아직 젊은 나이셨는데 가엾다 못해 어리석어 보였다. 병문안을 마치고 나오는데 세상에 가장 불쌍한 두 종류의 인간 모습이 비쳤다. 하나는 나처럼 젊고 건강한데 일 못하는 사람과, 또 하나는 큰 숙부처럼 돈도 많고 할 일도 많은 데, 병이 들어 누워 계신 분이 바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의 생각은 오래도록 아직까지 내 정신 속에 불변의 통찰로 각인되었다. 불쌍한 두 종류의 인간상 말이다. 이후 나는 노동과 노동하는 인간에 대해 자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노동의 기쁨과 보람, 가치와 숭고함 등에 대해서 ……. 그리고 나름 결심을 하였었다. 나는 죽는 날까지 적어도 ‘파∙마늘이라도 다듬는 노동하는 인간’으로 살 것이라고. 세월을 거치면서 노동의 내용과 분야에 대해서는 대폭 수정이 되었다. 인간존재의 노동이 어디 육체노동만 있으랴? 정신적 노동과 영적 노동도 육체노동 이상의 노동이 아니겠는가? 생기발랄하고 왕성하고 건강한 신체노동뿐 아니라, 늙고 병들고 죽어감도 신이 섭리와 은총에 응답하는 존재의 사명이라면 이 또한 비할 수 없이 거룩한 노동이라는 것을.

내 아버지도 한평생 가족 부양을 위한 노동으로 고단하시게 사시다 어머니에 앞서 돌아가셨다. 흥도 있으시고 달란트도 있으셨건만 당신이 물려받은 환경에 속수무책이셨다. 수고에 비해 당신이 누린 안식과 평화가 너무 빈한해 회고하면 가슴 저릿한 아픔과 죄송함이 있다. 어머니도 오래도록 노동하셨다. 우리 소유의 땅이라곤 늦게 장만된 논 몇 마지기뿐이어서 오래도록 남의 밭일을 해주고 삯을 받으셨다. 칠십이 넘으셔서도 이웃집 과수밭에 적과(다수의 열매를 솎아내고 좋은 것으로 한두 개 남겨 두는 일)등의 일을 하셨는데, 한 번은 사과나무에서 떨어지셨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하느님도 돌보시고 그 집 과수밭 땅이 푹신해서인지 크게 다치시지는 않으셨다. 그렇게 일을 하셨건만……. 요 만큼밖에 못 사는데 그만 좀 하시라고 나는 뵐 때마다 읊어댔지만 소용이 없었다. 팔십이 가까워 오실 때는 평소 눈여겨보아 둔 무단 경작지 기찻길 옆에 호박을 심으셨다. ⟦이곳에 무단 경작을 금지합니다. 충주시 경찰서장 백.⟧이라고 푯말이 꽂혀 있는 바로 그 곳에. 그동안 아무도 농사짓지 않는 처녀 땅이라 비옥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었다 하면 풍작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곳은 한 개도 아닌 두 개의 기차 길이 가장 급경사로 휘어져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어렸을 때 종종 기차 사고를 보았고, 내 어머니는 일찍 어린시절부터 가는 귀도 먹으신 분이고, 이제 나이 들어 동작도 굼뜬 분이라 무척 걱정이 되었다. “어머니 경찰서에 고발할 거예요” “고발해라…,나는 죽어도 그만 못 두니 그리 알어...“ 마지막 해 그해도 호박 대풍작을 거두신 어머니는, 다음 해 하느님 나라로 주민증을 옮기셨다. 어머니가 떠나신 뒤에야 어머니께 노동이, 일한다는 것이, 당신에게 무슨 의미였는지 정리해 보았다. 노동은 어머니에게 고달픔이며 힘듦이었지만 동시에 기쁨이며 활력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한평생 단련되어 온 노동과 함께 살아온 분들과 어울려 일을 하는 재미, 주인이 차려내는 따근한 새 참과 점심을 어울려 같이 먹는 기쁨, 수다와 이야기도 꽃피우고, 뭐니 뭐니 해도 money)돈이 생기고, 고단하시니 불면 같은 말은 생전 인연 없는 숙면을 이루시고……. 따져보니 일석 오조나 되는 참으로 좋은 사회활동이 노동이었다. 어머니께 노동이란 기쁘고 즐거운 친교이고 놀이이며, 재화가 쌓이는 생산적 사회활동이었던 것이다. 딸이 아직 늙은 어미의 처지에 있지 않아 어머니의 그 거룩하고 숭고한 일상을 활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얕은 효심으로 통제하려 한 것이다. 에고 나의 철부지함이여!

성경에서 노동은 하느님의 벌이라고 한다. 한 처음 창조된 인류의 원조 아담과 하와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에덴동산에서 노동 없이 살았다. 그저 하느님이 명령하신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 만을 건들지 않으면, 얼굴에 땀 흘리고 손에 흙 묻히며 살 필요가 없었다. 놀다가 배고프면 먹고, 잠자고 싶으면 자고, 노동의 피곤과 고단함과는 무관하게 근심걱정 없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면 되었다. 그런데 하느님의 명을 거역한 벌로써, 하와는 자녀 출산과 가부장적 권력으로 표상되는 남편의 힘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하는 고단한 처지가 되었다. 아담 또한 얼굴에 땀을 흘리도록 노동을 해야 하와와 자녀들을 부양하고 살아 갈 수 있는 노동의 인간이 되었다. 그러나 어떤 성서학자는 이것이 신의 저주와 징벌이 아닌 오히려 인류와 인간에 대한 축복이라고 한다. 나도 당연히 후자의 입장이다. 인간은 삶의 자리와 시간 안에서 성실하고 근면한 노동을 통해 삶의 축복을 유지하면 죄악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한다. 또한 인간은 출산을 통한 세대교번으로 창조질서를 이루며 좋으신 하느님이 만드신 에덴동산을 영원히 이어간다. 뱀이 벌로 받은 땅 바닥을 기어 다니는 운명도 어디 뱀뿐인가? 그러니 에덴동산 하느님 나라는 현실은 무노동에 무의도식 흥청망청 살아가는 곳이 아닌, 서로에게 잘 알맞은 적절한 노동의 대가로 정의와 평화를 이루며 상부상조 살아가는 환경과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죽기전까지 ‘파∙마늘이라도 다듬는 노동하는 인간이 되겠다’는 소박한 결심을 한 것일차적으로 “할)일 없는 게 (고된) 일이다"(non laborare est laborare)이라는 통찰이고, 다음으로는 노동하는 인간의 실존과 희망을 간파한 것이다. 노동의 영역은 크게 육체와 정신노동으로 분류될 수 있겠다. 사실 인간에게 육체와 정신은 분리 불가한 한 세트라서 육체와 정신노동을 어떤 식으로 분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도 하다. 노동은 또 영적이고 종교적 차원으로 세분화될 수 있다. 이러한 기준에 의하면 인간은 존재자 그 자신을 위한 생존과 완성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하느님 품 안에 안기기까지 즉 죽기까지 노동하는 인간이다. 이것이 노동하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이해이다. 그런데 건강하고 왕성한 효율성이 높은 젊은 활동만이 노동으로 치부하는 세상적인 분류가 아닌, 늙음과 병으로 쇠약해짐, 임종하는 자체, 죽음 자체도 거룩한 노동)소임에 속하는 것이다. 아무튼 대부분 모든 이가 두 개의 노동 영역을 필연의 과정으로 통과의례로 겪을 것이다. 혈기 왕성한 젊음 때의 노동 시절과 늙고 병약한 노년기의 노동 시대를.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 품안에 안기는 노동까지 포함하여. 내가 몸 담은 수도 공동체는 그것을 소임이라고 한다. “노동“ 보다는” 소임“이라는 표현이 훨씬 근사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집단의 영향과 작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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